Justin’s Story
저스틴의 이야기
“My parents and I came to the United States when I was two years old. Like other parents, we came here because we wanted a better life, future, and opportunities for our family. We first went to Southern California, San Fernando Valley and then I grew up around LA. Later, we moved to the Orange County area.
제 이민 이야기는 제가 두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온 것으로 시작됩니다. 다른 여러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저희 부모님은 더 나은 삶과 미래,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이민을 오셨죠. 처음에 정착한 곳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San Fernando Valley였지만, 후에 LA 근처에서 자랐고, 나중엔 오렌지 카운티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Because of how much my parents worked, I had a difficult childhood. At a young age, I always felt a sense of loneliness because my parents were never around. At the time, I didn’t realize that they were working long hours to provide for me. My parents wanted the best for me, but I felt that they thought that their work was more important which made me feel alone.
부모님이 항상 일하셨던 탓 인지, 제 유년기는 참 어려웠다고 기억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항상 집에 안 계셔서 외로움을 자주 느꼈고, 부모님이 이렇게 바쁘게 일을 하시는 이유는, 나아가, 저를 위한 것이란 걸 알기엔 너무 어렸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항상 최선의 혜택과 삶을 주고 싶으셨겠지만, 어린 저는, 부모님이 저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며 많이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When we moved to Fontana, that’s where it felt like everything I was going through was manifesting. I was away from all my friends, and I didn’t know how to deal with it. And then eventually, from junior high to high school, I met a group of guys that were like me. Our parents were never home and we were always home alone. So we’d all hang out, make some fun, smoke, and drink. Soon I started getting myself involved with those types of guys and then eventually, at 16, I ended up joining a gang.
Fontana로 이사할 때 즈음에, 이렇게 생각으로만 함께하던 외로움이 조금씩 나타났습니다. 친했던 학교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부터 힘들었지만, 차차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저와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죠. 저와 마찬가지로 이 친구들의 부모님도 항상 집에 계시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같이 어울리며 놀고, 흡연도 하고, 술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 스토리는 제가 16살 때 갱에 들어가게 되면서 더 빠르게 진전되었죠.
It felt like I was living a double life. My parents never knew that I was in a gang. I never missed a day of school, but after school, I’d hang out with those guys. I wanted to be cool, and there was a lot of peer pressure to fit in.
마치 이중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은 당연히 제가 갱에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셨고, 전 한 번도 학교 수업을 빠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과 후에, 같은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 친구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참 많았습니다.
I was the youngest one in a gang and the rest of the guys were older than me, so I looked up to them. I was willing to do anything that they were doing. Drinking, smoking, and hanging out late at night, to three in the morning. Even fighting. I would see the older guys fight and see the respect they’d get. I also wanted that same respect. Growing up in Orange County, I used to get bullied a lot by older guys, so I’ve always felt that resentment. After joining a gang, I felt like I was getting out all of the loneliness and resentment that I had been feeling.
갱에 있는 멤버 중에 전 가장 어렸고, 자연스럽게 형/누나들이 하는 것을 배우고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흡연도 하고, 새벽 세 시 정도까지 밖에서 노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싸움하는 것도 있었고, 선배들이 싸움하며 주변의 리스펙을 받는 것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자라면서 집단 괴롭힘 등을 당했기에 항상 그때의 억압과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갱에 들어가고 나서부턴, 그런 외로움이나 분노가 조금씩 표출되었습니다.
But eventually, I got incarcerated. My type of thinking at that time was definitely very warped and twisted. I was having fun and I felt like nobody else in high school around my age was living that type of life. I felt very exclusive, and it got to the point where I thought it was okay. I thought it was okay to hurt people. I justified it all that I could get away with it. So, me and my friends, we ended up shooting another gang and then we were charged and convicted. We were sentenced to life in prison.
하지만 결국에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배배 꼬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들 중 에서 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유아독존과 같은 삶을 살던 중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해도 괜찮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나라면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저와 제 친구들은 다른 갱 멤버를 향해 총격을 가했고, 혐의로 인해 기소되었습니다. 후에 유죄판결을 받았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습니다.
At first, the reality didn’t hit me yet. I thought, “I’m still young. I grew up in a good household.” I had this sheltered kind of thinking, like, “nothing bad will ever happen to me.” So I had that type of mindset, the first year, and then we went to trial, and we got convicted. At that time, I was 17 years old. I still remember that day, it was October 18 2007, when they found us guilty for all these charges. And we were sentenced to 82 years to life.
처음엔 멍 한 생각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직 어리고 좋은 집안에서 자라왔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삶이 계속 평탄할 것 같다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첫 1년의 재판 기간 동안 내내 그렇게 생각했고, 결국 유죄판결을 확정받았습니다. 당시 17살이었던 저는, 2007년 10월 18일,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고, 유죄판결을 받으며 최소 82년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At that moment, that was the starting point of my change. Because that's when I realized, like, this is serious, this is for life. They're telling me that I'm never ever going to get out. So that's when reality hit me. And that's when I started thinking about all the choices that I made. All the people that are hurt, and all the pain that I put my family through. I even thought about my little dog Snow. I thought about how lonely she’d be and who would take care of her. I started thinking about all those things. At that point, I just, I just believed that my life was over, and I didn't want to be known or remembered as this young kid, this young punk that was a gang member that committed this crime. I wanted to be someone different.
그 순간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깨달은 것 같습니다. 남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과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가 그때까지 택해왔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제가 다치게 한 모든 사람들과 제 가족들에게 끼친 아픔까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강아지 스노우가 생각난 건 당연하고요. ‘스노우는 누가 돌보지,’ ‘스노우가 날 얼마나 보고 싶을까,’ 이렇게 사소한 생각들을 하게 되며 뉘우쳤습니다. 제가 갱에 소속되어 있고, 범죄나 저지르는 불량배로 기억될 수는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Eventually I was able to get parole and was released from prison early, but as soon I was released, I was detained by ICE agents because of my undocumented status. The agents were waiting for me outside upon my release and took me to their facility in Bakersfield. This was around the time when Coronavirus was spreading, so it was going crazy and a lot of people in the facility were catching it.
뒤에 가석방이 되고 일찍 출소 할 수 있었지만 출소 되자마자 ICE 요원들이 절 데리고 갔습니다. 서류 미비자라는 이유로 베이커스필드에 있는 수용소로 가게 된 거죠.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 퍼지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수용소 내의 많은 사람이 감염되는 추세였습니다.
Fortunately, I was released after only 10 days after being granted parole by the Governor, but despite that I still felt devastated. I was devastated by the fact that just because I was born in a different country, I’d have to be detained again, whereas other people born here don’t have to go through that process. It’s inhumane, and I know many people that are still stuck in that detention center.
주지사의 요청으로 10일 뒤에 풀려났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가둬졌고,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과는 다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너무나 비인도적인 행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수용소에 아직도 수감되어 있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I'm currently out on an ankle monitor. But there is a little sense of fear that I could be detained again, pending deportation, if they do decide to deport me back to Korea.
현재 전자발찌를 차고 다니지만, 제가 한국으로 추방된다면 수용소에도 다시 구금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더 큰 것 같습니다.
From the Biden Administration and Congress, I hope that people like us, people like me, are able to stay with our families. My father passed away while I was in prison, so my mother is all I have and I am all that she has, so I want to be able to build my life here, build something that I can give back.
새로이 들어선 바이든 정권과 의회로부터 저와 같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지낼 방안이 마련되길 희망합니다. 수감 생활 중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전 서로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고, 제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I believe I'll be more of a value here than in Korea. I understand the culture, understand the struggles the young kids go through, and I can share my story of gang culture and prison experience and help many people. I want to build my life over here, and I hope that something that I have committed as a teenager won’t hold me accountable for the rest of my life. I've served my time, and I've addressed all those issues in front of the parole board members and even before the Governor of California. But I hope that Biden or anybody else in Congress is able to see us people for who we are today. Not the things that we have done decades and decades ago, but the value that we're able to bring today, and I'm impacting people's lives as much as I can being of service.
저는 한국에 가는 것보다 미국에서의 저의 삶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미국에 사는 청소년들이 겪는 일들을 더욱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갱에 소속되어 있던 제 경험과 수감 시절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른 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곳에서 제 삶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청소년기의 과오를 바로잡고 살 수 있도록 수감생활도 지냈고, 가석방 위원회와 캘리포니아 주지사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이든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과거의 실수로 제 삶을 재단하기보단, 현재에, 그리고 미래의 제가 사람들의 삶에 끼칠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But without status, I can’t get a job, and I need a work permit which takes a long process, so I can’t just work anywhere I want to. There's a whole lot of obstacles that I have to go through. I feel like people aren't willing to invest in me because of my undocumented status and that I can be taken away anyway. Even in my personal life, I feel like sometimes I’m hesitant to build relationships or meet somebody, knowing the fact that I can be taken away at any moment. I feel like, in a sense, I’m free, but I’m still in prison.
그러나 미국에 이민 신분 없이는 직업도 가질 수 없고 직업을 가진다 해도 근로 허가를 받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제가 서류 미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사람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언제든 수용소로 끌려갈 사람이라고 생각돼서인지, 제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길 꺼립니다. 제 개인적인 삶을 되돌아보더라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 주저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자유로운 신분이 수감생활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I try not to let those mental things get in the way. I just want to give back as much as I can. I know, as a young kid, I’ve taken so much from my community, but now, as a young man, I just want to give and give and give and continue to change people’s lives wherever I go.
이렇게 혼자 생각의 함정 속에 갇힐 때면 타인을 위한 미래의 삶을 생각하며 버티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 사회로부터 받고만 살아왔지만, 어엿한 성인으로서 베푸는 삶을 실천하고 싶고, 만나는 사람들 또한 저와 같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습니다.
But I can’t do that. Because I’m not a citizen, I can’t do that. But I want to. I want to be able to stay here with my family, to go to school, to get the job that I want. I want to be able to meet people, to marry somebody and start a family here and not have everything feel like it’s in shambles or limbo. There are certain things that I don't think about, that I can't think about because I have to deal with this first. And I don't want to bring anybody down along with me going through this process.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제가 미국 시민이 아니기에 불가능합니다. 저는 제 가족과 이곳에서 함께 살고 싶고, 학업을 이어가고, 취직하고 싶습니다. 인간관계를 쌓아가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가고 싶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들, 살아가는 세상이 이도 저도 아니고, 붕 떠 있는 그런 상황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미래를 상상해 보고,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2의 삶을 꾸려나가는 동안 더는 남들에게 상처만 줄 순 없습니다.
I want to be somebody notable, somebody that's making drastic change in our community for people like me, and I want those people to know that there are people like us fighting every day for not just freedom, but to be better and to encourage people to be better around us.”
저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남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 표면적인 자유와 개인의 영달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과 타인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사는 그런 나이고 싶습니다.”
On January 8, 2021, Justin submitted his application for a pardon from the Governor of California. Help Justin stay home and sign his petition!
Want to help fight for people like Justin? Join our campaign! In addition to sharing stories, we are calling Congress EVERY DAY and hosting a daily vigil at the White House for the first 100 days of Biden’s presidency to demand citizenship for all undocumented immigrants!